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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전도자 디 엘 무디(1)

by 小潭(炯曉) 201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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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전도자 디 엘 무디(1)

 

 


 ◎ 읽을 말씀 : 고전 1:26-31
 ◎ 관련 찬송 : 391장, 347장
 ◎ 외울 말씀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 참고 말씀 : 고전 1:18-21; 2:1-5
 ◎ 목     표 : 1) 무디의 생애와 신앙을 통해 교훈을 얻자.
 2)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분이심을 알자.

 ◎ 공부할 내용
 무디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지만 19세기에 미국의 대부흥사로 활동한 하나님의 위대한 종입니다. 오늘은 무디의 생애와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무디의 성장 과정

 무디는 1837년 2월 5일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인 ‘노스필드’에서 아버지 ‘에드윈 무디’와 어머니 ‘벧시 무디’ 사이에서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자 석수(石手)였는데 무디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무디의 가정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무디도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유니테리언파’(2) 교회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무디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무디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무디의 어머니는 자녀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디는 일찍부터 도회지로 나가서 돈을 버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결국 무디는 17세가 되던 1854년에 보스턴에 살고 있는 외삼촌인 ‘사무엘 홀톤’에게 가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무디에게 한 가지 고용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무디가 매주일 ‘마운트 버논’이라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외삼촌이 경영하는 구두 소매점의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855년 무디는 주일학교 교사인 ‘에드워드 킴볼’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1856년 5월 3일에는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무디는 1856년 9월에 시카고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서 그는 구두 외판원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고 수입도 상당히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번창하여 그가 꿈꾸던 목표액이 순조롭게 달성되어 가는 동안 무디의 마음은 점점 신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로서 문제 아동과 신입생들을 가르쳤는데 무디가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 무디의 헌신

 1861년 무디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 번창 일로(一路)에 있던 구두판매 사업을 접고 복음 전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무디는 기독청년회의 간부로 북군의 특별 군목이 되어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인 1862년에 ‘엠마 레벨’과 결혼하였습니다.
 1867년 무디는 독감에 걸려 있던 아내의 건강 회복에 여행이 좋다는 의사의 권고를 듣고 영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무디는 당시 유명한 목사였던 스펄전과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와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만남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후에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무디는 1873년부터 2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영국 전도여행을 하였으며, 이때 그는 영국 교회 사상 최대의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무디의 솔직한 설교와 ‘생키’(3)의 영혼을 뒤흔드는 찬송이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무디의 영국 전도여행의 성공은 무디의 미국 전도여행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디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오자 미국의 각 교회들은 무디를 초청하여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침체 상태에 있던 미국 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3. 무디의 신앙과 업적

 무디는 매우 솔직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통 때에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며,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상상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생동감 넘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무디를 칭찬하였으나 무디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자기에게 열광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디는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무디를 ‘무식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나는 문법도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문법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예리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지성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데 당신은 주님을 위해 그 뛰어난 지성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자신처럼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1879년에 여성들을 위한 ‘노스필드 신학교’를 세웠고, 1881년에는 남자들을 위한 ‘마운트 헬몬 고등학교’를 세웠으며, 1889년에는 ‘무디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기독교 단체들을 세워 사람들을 정직하고 근면하며 경건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식쟁이’라고 놀림당하던 무디가 19세기 미국의 대부흥사로 활동하며 교육 사업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참조, 고전 1:27)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 때문이었습니다.
 1899년 12월 22일 무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이는 나의 승리이다. 오늘은 내가 면류관을 쓰는 날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 성경연구
1. 무디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여 큰 영향을 끼친 복음 가수는 누구입니까(공부할 내용 참조)?
2. 사람들에게 ‘무식쟁이’라고 놀림당하던 무디가 19세기 미국의 대부흥사로 활동하며 교육 사업에 전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공부할 내용 참조)?


 ◎ 나눔과 적용
1.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 경우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2. 당신은 범사에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의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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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 엘 무디 : Dwight Lyman Moody를 말한다.
(2) 유니테리언파(Unitarianism) : 1774년 런던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한 교파로서 삼위일체설을 배격하고 유일 신격(唯一 神格) 즉, 단일신론(Unitheolism)을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파이다. 한편 무디는 어린 시절 이 교파에 접촉하기는 했으나 신학적인 영향은 받지 않았다. 
(3) 생키(Ira D. Sankey, 1840-1908) : 당시 미국에서 대중 가수로 인기를 누리던 생키는 1870년 인디아나 주의 인디아나폴리스에서 개최된 YMCA 국제 대회에서 무디를 처음 만난 이후 무디의 제안을 받아들여 찬양으로 무디의 복음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