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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국내 성지순례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 옥중에서 순교한 소양 주기철(朱基徹)

by 小潭(炯曉) 2015.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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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 옥중에서 순교한 소양 주기철(朱基徹)  

 

웅천면에있는  

생가 

 


1. 성장기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이끌고 조선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 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듣고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 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주기철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중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낙향한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 이즈음 그는 김해 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문창교회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 그는 출신도 별로 나뉘어 있던 기숙사 제도의 맹점을 학교당국에 시정토록건의, 혼합방식을 채택토록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부산 초량교회 

 



3. 신사참배 거부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 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고한다.

그는 또 이때 신사참배가 기독교교리 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평양 산정현 교회

 산정현 교회 제직들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이 계속되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 앞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4. 투옥 생활
이로 인해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 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 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 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 찬양을 했다고 한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5. 유언과 순교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 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
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주 목사님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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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주님, 나를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채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오정모 사모 

아들과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 03.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 03. 23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 04.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2. 03.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 11. 05 차남 영만 출생

1922.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 01. 09 3남 영묵 출생

1925. 02. 22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 3남 영묵 병사

 

1929. 경남노회에서 주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 03. 05 장녀 영덕 출생

1930.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 0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18 4남 광조 출생

 

1933. 05. 16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 08. 부친 주현성장로 별세(향년81세)

1935. 5.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 12.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날 “일사각오” 설교

1936. 주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 07. 평양산정현교회 부임

1937. 09. 05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 02.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당함

1938. 06.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 0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 08.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1938. 08. 의성 농우회 사건에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 09. 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 02. 04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 02. 05 평양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09.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 12. 19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 03. 24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 04. 주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 여름 제4차 검속

1941. 8. 25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당함

1944. 3. 31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1944. 4. 21 오후 4시 주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1944. 4. 25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1947. 1. 27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1950. 9. 주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1990. 12. 21 주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1997. 4. 20 주목사 복권 및 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