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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러시아

우스르스크의 한인 발자취를 따라서~~

by 小潭(炯曉) 2015. 8. 28.

 

 

신한촌(개척리)

 

구한말 흉년과 관리부패로

1874년에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꿈과 희망을 모아 척박한 이땅에 13가구 60명이 구한촌을 세워 정착했답니다

그러나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정부는 시 외각으로 이들을 강제 이주시켰읍니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 을 신개척리라고 불렀는데

한인들은 "신한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새로운 한인촌" 은 당시 규모가 가장 큰 한인 주거지로 1910년대 항일의 구심점이 된, 

 한때 망명 정부인 대한 광복군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던 유서깇은 땅입니다

 

신한촌 기념탑은 1999년 해외한민족 연구소가 한국의 한 사업가의 지원을 건립되었읍니다

세계의 석조물로 세워진 탑은 가운데 석조물은 "한국"을 죄측은 "북한"을 우측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의 한민죽을 상징합니다 

 

 

 

 

16년째 신한촌 기념탑을 관리하고 있다는 고려인 리바체 스라브 씨는 지역 고려인 단체 간부 출신으로

 몇 년전 뇌졸증으로 쓰러져 심하게 앓았지만 혼자서거동할 수 있게 되어 여전히 신한촌을 지키고 있덨읍니다

 

관리인이 안내한 곳에는 방명록에 서명하고 약간의 기부금을 전달하였답니다

 

라즈돌리노예역

 

 우스르스크에있는 라즈돌리노애역 이곳은 승객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 조그만 간이역이지만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구실로 한인 지식인 삼천명을 총살시키고

강제로 중앙아시아 8개국가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이주시킴

십칠만명이 목적지도 모른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짐짝처럼 실려가야했답니다

그러나 이주 다음해에 칠천명이 사망하고 다음해에 4,800여명이 사망했다하니

 

한겨울  황폐한 땅에 버려진 고려인들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며 살아남은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농토를 개간하여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뤄내어

3년만에 자립 기반을 일구었답니다

 

끝나지 않은 그들의 또다른 고통 소비에트 정권무너진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했던 고려인들 은 또다른  유랑의 길에

블라디보스톡과 우스르스트에 사만명이 역이주하여 살고있읍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려인들은 5년 거주할 수있답니다

 

 

 

강제 이주때 사용했던것과 같은 화물열차72량이 지나가네요~~ㅠㅠ

 

 

 

 

담장안으로 보이는 최재형 선생의집

 

 

 

 

최재형 선생은 일제때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읍니다

최재형 선생을 빼놓고는 연해주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사를 논할 수 없답니다

 

조선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적격한 안중근 의사와 그의 숭고한 희생은 온 국민 마음 속에 깊게 남아있으나

 그 뒤에서 버탐목이 됐던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기억하는 이는 드물지요

 

최재형 선생의 집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 함께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에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중요한 무대였으며, 일제 의 4월 참변으로 인해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눈물의 땅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서 11세에 집을 나온후 헌원생활을 통해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17세때 이러한 경험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연해주 조선인들의 대부로 성장했다합니다

당시 연해주 현지에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거의 유일한 조선인이었고, 이러한 배경덕에 러시아 정부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답니다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재정적 지원을 했고, 1905년 일제와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뜅들었습니다

특히 이토 힐부미를 저격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와는 각별한 관계로,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은 이곳 최재형 선생의 동의회를 통해 전개돼었습니다

1909년 10월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 프 채푸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엿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개된 바탕은 최재형 선생의 기획이라고 할 수잇다

 

아우 안중근을 먼저 떠나보낸 최선생도 결국엔 그 길을 따르게 된다, 1920년 4월 참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최재형 선생의 집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우수리스트는 블라딥스톡과 함께 이미 조래 전부터 조선에서 넘어온 독립운동 가들이 활동한 주요 무대였으며 ,

일제의 4월 참변으로 인해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눈물의 땅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현재도 일만 육천명의 고려인이 살고 잇는 대표 정착도시입니다

 

1909년 동의회 소속의 안중근의사는

단원11명가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남긴 大韓獨立 네 그자의 혈서가 또렸이 남아있읍니다 

 

 

 

이곳 고려문화센터 역사관에서 보여주는 동영상과 박물관 전시물을 보니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들이 정착하게 된 경위와 독립운동, 그리고 중앙아시아로의 유배, 후손들의 재이주,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어있었읍니다

러시아 한인이주140주년 기념사업으로 정부에서 세운 고려문화원

 

 

1917년 48세 나이로 작고한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은 떤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ㅇ 돌아갈 수 있으랴 . 내 몸과 유품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를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고 유언을했고 유언에 따라 유골은 수어푼 강에 뿌려졌읍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수어푼 강은 유유히 흐르고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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