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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문화공간

영화 국제시장

by 小潭(炯曉) 2015. 1. 19.

 

 

 

 

 

1,4후퇴때 많은 피난민들이 마포에서 한강을  道江해서 영등포 역으로..

6,25때 한강 철교가 폭파되어서 피난가지 못했던 피난민들이

 유난히 추워서 한강 전체가 꽁꽁 얼어서 많은 피난민과

소달구지에 실은 짐이 모두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답니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기차위에 메달리고 겨우 대전까지 더이상 기차가 남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하차하라네요

동생업으신 엄마와 짐을 내리고 우리가 내리지 않았는데...

기차 떠나는 바람에 잠시 이산 가족이 되었었지요

기차 화통을 타고 아버지와 언니 오빠와 함께 대전역으로 다시돌아와 보니 

엄마가 짐과 함께 내린 자리에 계셔서 하룻만에 다시 만났답니다

 

13살난 언니와 등에 메달려 피난길에 있었던 3살배기 였던 동생은  

아옹 다옹하며 마포 자이 아파트 단지에 살고있고

11살 두려움을 알았던 오빠는 놀램으로 병이 들어 평생 질병과 투쟁하며

여전이 예쁘게 살아가고 있네요

네돐 지내며 피난길을 소풍길처럼 나섯던 철 없는 동생이었던 나는 

며칠전 칠순을 지내며 여전히 예수 잘믿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있고

전후 에 동생 세명이 더 생겼답니다......

 

 

먼저 국제시장을보려다가 심권사가 보았다기에 데이콘3를 보았는데

은행 다녀오는 길에 들렸더니 영화가 5분 전에 시작햇다네요

 

침침한 관람석을 찾아드니

흥남부두에서 피난대열에 끼어 막내 여동생을 잃어버려 아버지가 배에서 내려 영 이별이 되는 장면이 네요

옛 생각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었답니다

 

 

흥남부두 선상에서 아들(덕수)에게 외투를 벗어 입혀주며

"애비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

부산국제시장에서 장사하는 고모 찾아가라"

마지막 아버지 말씀을  맘속에 새기며 어린 덕수는 가장의 길에 서지요

 

 

 

쵸코렛드 기브미 기브미 ~~하며 구두닦기로

 만난가장 친한 친구 

오달수와 멋진 콤비

파독 광부로, 월남전으로.. 

 

 

 검정고시로 대학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기쁨에 뛰며 집에오니

남동생이 서울대 합격했다는 소식이 기다리네요

 

 

파독 간호사와 만나 사랑의 꽃을피우고 

결혼도하고 

 

 

 

동생을 위해 파독광부의 길로 ...집도사고 동생 공부시키고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여 애기도 낳고 이제 끝인가했는데...

가장의 길은 이게 끝이 아니었지요

 

 

 

가장의 책무로 오달수와 파독광부로 ..

월남으로... 

 

 

 

여동생 결혼자금과 고모가 돌아가신후 고모부에게 가계를 사기위해  파월의 길로...

폭탄에 맞아 다리를 절며 집으로

혹시나 아버지가 고모가계로 찾아올까 기다리며

가족들이 팔아없에라고 성화를 해도 , 이상한 노인네 고집이라 해도 가게를 붙잡고 아버지를 기다리네요

그 속을 누가 알까....?

 

 

이산가족 찾기에 잃었던 동생이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는 것을 확인하고

동생의 가족을 만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답니다

 

 

이산가족착기에 나가서 동생을 찾고 

고모가계를 인수하여 간판을 달며,, 

 

 

 

초로의 노인네가되어 어머니  기일에 가족들이 모이여 화기애애한 자리를 떠나

자기방으로돌아와 어린 덕수는 아버지 영정앞에

 

아버지여 약속 지켰지예

나 잘 살았지예

난 무척 힘들었지예"

 

목메인 덕수의 넉두리를 들으며 목이 메이네요

 

이젠 가계 팔아도 된다.....

우리시대의 장남 , 아버지들의 삶..그 땐 그랬었지.....

 

2015,1,17

 

흥남부두

 

1050년 12월 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피던 미국 국적 화물선

Meredith Victory호에 레너드 하무 선장은 인산인해를 이룬 피난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북한 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다,

그들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에 아이가 있었다( 빌길버트의 기적의 배) 중에서

 

당시 23살의 일등선원이었던 로버트러니(현재79세. 변호사)는 1만 4천명을 구조해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올려져있다

모든 인원이 승선하는데 16시간이 걸렸으며 , 당시 영하20도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한다

그리고 배에 탄 피난민들은 거제도로 보내졌으며.

철수작전시 흥남부두는 함포사격으로 폭파되었다고 합니다

 

흥남부두 철수 작전에서 인용함

 

기적의 배와 크리스마스 케롤 1만 4천명 감판에 촘촘히 선체 한사람 희생 없이 선제로

6,25당시" 기적의 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것과 다른 맥아더의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쓰면서 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동부전선으로 진격햇던 알몬드 장군 휘하의 미 10군단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철수를 시작햇습니다

해안에 미조리 함을 비롯한 미해군의 주력부대가 온통 집결하여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폭격을 해 대면서

흥남에 집결한 부대를 질서 있게 철수시켰습니다

한국인 피난민들도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동부전선에 들어가 있는 군인은 12만 정도였는데 이들과 함깨

 탱크, 대포, 장갑차, 차량,화약 등을 철수시킨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美해군기록에 의하면 이때 해군철수작전으로 철수한 군인수는 10만5천명,

화물은 탱크 1만7천5백대. 포탄등 군수물자 35만톤, 그리고 민간인 9만1천명입니다.

 

철수 군인에 거의 맞먹는 민간인 피난민을 실어날았습니다

세계 군사 역사상 군인과 맞먹는 숫자의 민간인 피난민을 철수시킨 예는 없습니다

 

 Captain Leonard

Larue는 전쟁의 충격으로 천주교 monk가되었습니다

피난민을 실어나른 배중" 기적의 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Meredith Vitory 라는 10만톤급 유조선인데 이배는 당시 미군에게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흥남에 들어갔습니다

철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을 내려줄 필요가 없어 회항할 예정이었습니다

12월 20일이었는데 선장 Leonard P Larue씨는 바다를 향해 살려달라는 울부짖고 있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멀리서 보면서

도무지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유조선이어서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어있고

사람을 태우면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고민했습니다

 

선원 30여명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전부이고 유조선이기 때문에 기름 냄새가 독해

사람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화재위험도 큽니다.

 

뱃머리를 차마 돌리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던중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을 너의 배에 태우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John Childs 대령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조선에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유저선위에 피난민 1만 4천명을 태웠습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없었습니다

배에 오른 1만 4천명은 앉을 자리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꼿꼿이 섰습니다

화장실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으며 통역자도 없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이 붙어 앉은 자리에서 볼일을 그대로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배에 움직일 수 없이 앉아 있는 한국의 피난민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함께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1950년 12월 함경도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란민들

 이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아주 느린 속도로 부산으로 내려와

12월 24일 밤(크리스 마스 이브) 거제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3백톤의 기름 화물선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것도 ,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는지 모릅니다.

배위에서 5명의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선장 Leonard P Larue 씨는 너무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전이 끝난 후 1954년 수도사가 되어 지난 2001년 천국으로 갈 때까지 단 한번 워싱턴에 나온 것 외에는

 수도원에 조용히 머물렀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나는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끝없는 위험을 넘으면서 한 사람의 영혼도 상하지 않고 행해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크리스 마스 파도위에서 분명하고 잘못일 수 없는 메세지가 내게 임햇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한국 해안의 을씨년 스럽고 비통한 바다위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나의 배의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이 신부님을 한번 찾아보기 위해 애쓴일이 있습니다.

좀더 열심을 냈더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보스턴의 어느 수도원에 있다는 말만 들엇을 뿐 결국 전화통화 한번 하지 못했고 물론 찾아봅지 못햇습니다

 

1만 4천명의 구조된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어떻게 구원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혹독한 향해를 견딜 수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그 기적의 배는 한때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임무를 다한 후

고철로 팔려 중국 어느 항국에서 1996년에 해체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이런 기적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들의 감동을 실은 노래가 바로 눈보락 몰아치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현인 씨가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입니다

 

정일화 논설위원( 전 한국일보 워싱턴 득파원)2008년 12월 24

 

소담 옮긴글

 

 

1,4후퇴때 한강 어름위를 건너는 피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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