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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국내 성지순례

111년의 역사 이룬 연동교회

by 小潭(炯曉) 2011. 10. 7.

 

111년의 역사 이룬 연동교회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의 요람 역할
     게일 초대 목사 교육 문화 다방면 활동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삼열(牟三悅 S. F. Moore)의 조사(助事) 김영옥과 천광실의 적극적인 시가전도와 이에 열렬히 호응한 신도들의 후원으로 1894년 지금의 위치에 있던 초가 1채를 매입하여 설립했다. 이곳은 당시 연못골이라 불리던 곳으로서 상인과 병졸들이 운집해서 살았던 조선 서민층 거주지역이었는데,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이길함(李吉咸)과 조사 서상륜의 전도로 서민층에 깊이 침투하여 포교함으로써,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896년 선교사 D. L. 기퍼드가 교회를 인도하면서 자기 집을 개조하여 예배당 헌당식을 가졌다.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J. S. 게일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기 시작했고 조사 고찬익이 그를 도와 교회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1904년 고찬익을 장로로 장립하면서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어, 조직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서울 종로 5가에 위치한 연동교회는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우리나라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한 게일 목사는 선교사, 교육가 그리고 저술가로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게일 목사는 일제의 침탈이 심하던 1900년 연동교회에 부임했다.

연동교회의 성장배경에는 외국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이에 부응한 서민들의 깊은 신앙심이 있지만,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연동교회를 통해 유능한 민족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 교회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점이다. 1904년 독립협회 회원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을때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 홍재기, 안국성 등 민족지도자들을 심방해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다. 연동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는 평신도선교사로서 우리나라 곳곳을 누비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했다. 그는 폐당된 민로아학당의 맥락을 이어 예수교중학교(현 경신고)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고)를 세우고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는 등 우리나라가 선진문화를 따라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최초의 한영사전을 비롯해 영문저서 9권, 한국어 저서 30권 등을 저술했다. 특히 외국에 우리나라를 소개하기 위한 책을 많이 저술했으며 현재 대부분의 책들은 워싱턴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연동교회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13년, 1918년 그리고 1933년에 그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연동교회 안에는 111년의 역사가 담긴 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3·1운동 후 대동단 사건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등에 연동교회 성도들이 사용했던 태극기를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 내 유물들을 통해 과거 기독교인들의 생활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일제에 대항하는 뜨거운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교회 앞마당에 있는 게일 목사 흉상과 1950년대 종들은 고대문학과 지식에 무지했던 우리나라 청년들을 질타하며 민족교육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던 게일 목사를 기억하게 만든다.  

지금의 교회당

 

게일선교사 파송 1백2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한 게일선교사의 후손들.

20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