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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국내 성지순례

강경 성결교회

by 小潭(炯曉) 2011. 9. 15.

 

 

 ‘자기들은 헛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리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압헤 죄 됨을 깨닷고 신앙의 주를 굿게 직히여 절하지 아니하엿더니’ 기독교잡지 ‘활천’(1924.10)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에 관한 기사에 일부이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을 맺음으로서 국권을 잃은 이름만 남은 나라가 되어버렸었다. 더욱이 일본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곳곳에 그들의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충청남도 논산에 위치한 강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강경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터라 1924년 이전에 이미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일제는 강경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옥녀봉에 신사를 건립했다. 옥녀봉은 유적지인 동시에 3·1운동 만세시위 현장이었기에 강경 사람들은 더욱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강경의 모든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런데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와 학생 57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거부이유는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강행한 조선총독부는 결국 교사와 학생들을 모두 학교에서 파면, 출교시키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했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어린이들에 의해 이뤄진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자 신앙적, 민족적 저항이 결합된 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강경성결교회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으로 일각에서는 천주교에서 주도한 운동으로 주장되었었다. 하지만 강경성결교회 담임 "신영춘 목사"가 활천과 동아일보의 옛 기사를 통해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임을 밝혀내고 지난 9월에는 ‘최초신사참배거부 선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강경성결교회의 앞마당에 설치된 기념비는 높이 5m로 김복희 교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거부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오직 민족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영춘 목사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신사참배거부운동이 일어난 이곳이 우리나라의 민족교육의 장은 물론 영성의 훈련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순복음 가족 신문 에서  소담 옮긴글

 

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제막식  2006.9.20)

  옆면엔 기념비 건립경과보고, 뒷면엔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1924년 12월 기독교잡지인 ‘활천’의 내용이 새겨졌다

 

강경초등학교 강당(1937년 건립)은 등록문화재 60호로 지정되어 보존 되고 있습니다

최초로 신사참배거부 운동이 일어났던 강경초등학교 당시 건물 모습

 

최초 거부 기사를 기사화 한 활천 1924년 12월호 복사판 

 

활천

이 사건은 1919년 3월에 일어난 일제 경찰에 의한 존 토마스 감독 구타 사건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 구타 사건은 영. 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결국 토마스 감독은 보상금을 받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강경성결교회 최초의 예배당 (현 강경북옥감리교회- 위 사진 참조)은 바로 이 보상금의 일부로 지어진것이다.

 강경성결교회는 민족애와 항일의식에서 남다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옛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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