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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국내 성지순례

상동교회 - 스크랜턴과 의료선교

by 小潭(炯曉) 2012. 2. 29.


 

 

상동교회 창설자인 스크랜턴은 의사이자 목사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화학당을 창설한 스크랜턴 대부인이고, 외할아버지는 저명한 미국 감리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1978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위해 지금의 콜롬비아대학 전신인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후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목사의 외손녀인 암스 양과 결혼했다.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의 영향으로 의료선교사를 꿈구던 스크랜턴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의료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망설임없이 의료선교사를 지원했다.

그때 어머니인 스크랜턴 대부인은 감리교 교육선교사로 지원하여 역사상 최총의 모자 선교사가정이 되었다.      

1885년 5월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이 한국에 입국 했다. 입국후  알렌의 부탁으로 제중원에서 일했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면서 조선 왕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병원 설립을 계획했다.

그러다가 9월에 자신이 미국을 떠나올 때 소포로 보낸 의료기구들을 전달받게 됐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나와 9월 10일 정동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스크랜턴의 진료소에는 평민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환자들중에 극빈자들이 많았고 종종 버림받은 사람들도 돌봐줬다.

진료소에는 1885년 말까지 2백50여명의 환자들이 다녀갔다.

환자들이 많아지자 자연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스크랜턴은 우선 이웃해 있는 땅과 집을 더 사들였다.

1886년6월 환자대기실과 사무실,약국,수술실,입원실 등을 갖춘 병원을 마련했다.

여자들을 위해 별도의 집을 구입,여자 입원실도 꾸몄다.

이런 일들이 왕실에 알려졌고, 스크랜턴의 ‘시란돈’(施蘭敦)이라는 한국이름을 따

고종은 1887년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시병원은 첫 민간의료시설이었다.

스크랜턴은 공간에 한계를 느낀 시병원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옮겼다.

상동으로 옮긴 시병원은 약국을 개설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직원들의 예배가 발전해 지금의 상동교회가 생겨났다.

스크랜턴의 병원은 곧 예배당이 되어야 한다는 선교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에는 의료사업과 동시에 병원전도도 병행되었다.

이 때 병원전도 방법은 복음에 대한 설교와 복음서 판매였다.

약과 더불어 쪽복음도 같이 팔며 전도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대합실에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상대로 날마다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특별집회를 가져 처음에는 10∼30명 전도가 모였으나,

후에는 많이 모여 상동교회는 처음부터 활기찬 출발을 하여 지금의 상동교회가 되었다.

 

 1902년 준공되어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에배드리던 옛 교회

 

 

 

 시 병원 (남대문 상동병원)

 

 

 

 

 

 

 

 

 

 

 

1998년 창립 110주년 기념예배

 

상동교회, 남대문 새로나 백화점 건물로 상층을 사용하고있다.